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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야생의 성형 -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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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꼬레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870회 작성일 12-12-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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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야생의 성형
 
가족모임이 있었습니다. 접시에 예쁘게 담겨 나오는 과일을 먹으며 이제 정말 과일의 제철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한 겨울에 딸기며, 어느 나라에서 수입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하는 루비처럼 붉은 빛이 고운 석류까지 한 겨울에 오르는 과일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이젠 먹거리에 제철이라는 개념도 약해지고, 어디서 자란다는 것도 초월한 시절이 왔는데, 이제 우리는 ‘웰빙’이라는 이름으로 제철 제땅에서 나는 것을 다시 값비싸게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본 모습인지도 잘 모르는 채 말입니다.

사실 과일은 식물의 열매 중에 특별히 맛이 있어서 재배하는 것입니다. 야생 식물들이 조화를 이뤄 살아가다 후손을 퍼트리기 위해 만드는 열매들의 수보다 이를 찾는 사람들의 수요가 훨씬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 식물을 모아 재배하고 그러다가 욕심을 내어 더 달고 더 크고 색깔이 좋게 하거나 씨를 없애거나 열매 맺는 시기를 조절해 경쟁력을 높이는 ‘개량’이란 것을 하게 됩니다.

알고 보면 우리 주변에서 과일을 비롯해 먹는 식물이나 아름답게 키워 곁에 두는 꽃이나 모두 인위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냥 자연에서 자라는 야생의 식물 없이 만들어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 산과 들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모습에서도 여러 조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산돌배나무를 보면 물 많고 시원한 배를 생각할 수 있구요. 머루와 다래를 보면 포도와 키위를 생각나게 합니다.

혹 산에서 다래를 만나면 그 속을 한 번 잘라 보십시요. 크기가 조금 다를 뿐 연두색 살에 까맣게 박힌 씨앗은 우리가 자주 먹는 키위와 똑같은 구조를 하고 있으니까요. 감을 보면 크기가 줄었지만 모양이나 꽃받침에 달린 모습은
고욤나무 열매와 똑 같지요.

곁에 두고 보는 꽃들도 그렇습니다. 귀여운 팬지꽃은 제비꽃에서 개량을 거듭한 것입니다. 장미는 워낙 많은 변형과정을 거쳐 얼마나 많은 야생의 핏줄이 섞여 있는지 모습을 찾기 어렵게 됐지만 이 땅에서 자라는 찔레나 해당화와 꽃의 구조나 향기에서 같은 집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기술로 엄청나게 성형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튤립도 어느 날 러시아 오지의 산에서 그 모습을 발견하면 정말 모든 것이 다 야생에서 나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자연보호가 지구상의 다른 존재들을 위한 구호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이기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요.

사람들의 필요에 맞게 만들어 내는 것은 진정한 창조가 아니라 자연에 있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다양성에서 일부를 골라내거나 과학으로 변형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연의 유전적 풀(pool)을 유지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루의 일상도, 이제 마감하는 한 해, 한 사람의 일생도 결국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숱한 가능성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해 지금의 나를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만드는 사회의 틀 속에서 만들어지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자칫 정말 인간 본연의 나를 잃은 채 ‘개량’돼가다 보면, 겉 모습만 번지르한 성취를 했을 뿐 인간으로의 나 자신은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과일가게에서 인기가 높은 배처럼 더 이상 야생의 산돌배나무가 가지는 달고
아름다운 향기도, 씨앗으로 새로운 배나무를 만들어내는 진짜 역할도 모두 잃고 바보처럼 웃으면서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나 자신은 아닌지 말입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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