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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 우리 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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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松 竹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댓글 5건 조회 1,412회 작성일 02-10-0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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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다. 그간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잔치도 크게 벌이고, 한글이 열어왔던 하늘을 우러르고, 한글에 줄줄이 매달려 있거나 알알이 박혀있는 빛나는 유산들을 헤아려보자고 외쳤다. 하지만 아무런 메아리도 없이 올해도 그저 그런 기념일로 지나갈 것 같다. 누군가 연단에서 기념사를 하고 한글날 노래 한 곡 부르고 곧장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해마다 우리는 ‘문화의 터전이요, 민주의 근본이요, 생활의 무기’이니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고 노래부른다. 정말 한글이란 문화를 꽃피우는 토양이요, 널리 쓰여 배움의 평등을 이뤘으니 민주의 근간이 되며, 쉬 배워 불편없이 쓰임은 생활의 무기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건 노랫말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영어에 대한 경외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 옛날 이 땅의 지식인들이 한자에 대해 경배했듯이. 새삼스러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우리말을 맛과 향과 결을 살려 그대로 글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은 이 지구상에 오직 한글뿐이다. 그런데도 모든 관습과 고유의 문화를 줄세워 우열을 가리는 야만적 세계화의 물결에 편승돼 한글은 오염되고, 구겨지고, 잊혀지고 있다. 말이 그러하니 글 또한 성할 리 없다. 영어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우리말 못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말과 글이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요즘처럼 우리 말과 글에 대한 구박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말들이 무더기로 사라져가고 있다. 우리말로 우리네 삶, 특히 농촌 풍경을 살갑게 그려냈던 백석의 시를 읽어보자.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 하니 열젖히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 오는 저녁’ 전문) 평안도 정주지방 사투리가 섞여 있긴 하지만 요즘 세대들의 글힘으로는 한여름 밤 어둠이 내리는 저녁 풍경을 그려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잊혀진 말들이 너무 많다. 시인은 박각시나방, 주락시나방이 박꽃을 찾아 날아들면 어둠이 내리고 돌우래(땅강아지) 팟중이(메뚜기)가 우는 사이에 별천지를 이루는 목가적인 풍경을 이렇듯 정겹게 묘사했다. 1940년쯤 발표된 이 시가 이제 겨우 60년 남짓 지났는데도 우리는 판독하기 힘들다. 우리말이 무섭게 잊혀가고 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복사꽃 고운 두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달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국민시로 애송되는 조지훈의 ‘승무’에서 나빌레라, 아롱질 듯, 휘어져 감기우고, 이 밤사, 하이얀 고깔 등은 한글 말고는 그 때깔을 오롯이 담아낼 그릇이 없다. 그렇게 한글엔 우리의 고운 심성과 숨결이 스며 있다. 한데 외래어와 외국어가 언어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있다.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는 주장까지 서슴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들은 세계화를 명분으로, 인터넷왕국 건설을 실리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글의 피폐는 우리 정신의 황폐함이다. 아이들의 꿈속에까지 영어가 스며들까봐 소름이 돋는다. 우리 말과 글은 우리가 보호하지 않으면 이 지구상의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우리가 버리면 흔적없이 사라질 뿐이다. 한글은 우리가 만든 우리 세대의 자산이 아니다. 우리네 삶의 무늬가 생생하게 박혀있는,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이다. 그런데도 탐욕과 패거리 이기심은 날마다 우리 말과 글을 오염시키고 있다. 말 아닌 말을 하고, 글 아닌 글을 쓰는 어리섞은 자들이여, 교언(巧言) 망언 공언(空言) 폭언 비어(蜚語) 식언(食言)으로 우리 글을 더럽히지 말지어다. 말이 칼을 맞으면 글이 피를 흘리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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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님의 댓글

얼레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이러다 한글 언어능력평가가 생기는거 아닌가 모르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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