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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피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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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김기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1건 조회 1,806회 작성일 02-03-2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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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를 잃어버린후 재호는 몸과 마음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돌이 지난 딸아이에게 먹일 분유값이 없어 애가 탔다. 친지와 친구들에게도 여러차례 도움을 받아 더 이상은 도움을 청할 염치도 없었다. 오늘도 재호는 일자리에 대한 기대를 안고 집을 나섰다. 퀴퀴한 냄새 가득한 골목길에는 깨어진 연탄재만이 을씨년 스럽게 날렸고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써 놓은 담벼락 낙서 위로 겨울 햇살이 한나절 둥지를 틀었다. 무거운 하루를 또다시 등에 이고 돌아오는 길에 재호는 문득 고등학교 동창생인 성훈이 생각 났다. 성훈이라면 자신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재호는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성훈이 오래전부터 가난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재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친구가 무척 보고 싶었다. 재호는 가파른 목조 계단을 올라 성훈이 화실이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 그때 중년의 남자가 흰종이로 포장된 그림을 들고 계단쪽으로 걸어 나왔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성호는 재호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겨울에도 화실의 난로는 꺼져 있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성훈의 얼굴도 까칠해 보였다. "손님이 왔는데 화실이 추워서 어쩌냐?" "내가 뭐 손님이야 춥지도 않은데 뭐" 재호는 미안해하는 성훈 때문에 일부러 외투까지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아직 저녁 안먹었지? 내가 빨리 나가서 라면이라도 사올게 잠깐만 기다려" 성훈이 나간 동안 재호는 화실의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벽에 붙은 그림속에는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어둠속에 귀가하는 도시 빈민이 있었다. 자신을 닮은 그 지친 발걸음을 재호는 한참 동안 바라 보았다. 라면을 먹으면서도 재호는 몇번을 망설였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윽고 재호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외투를 꺼내 입었다. 회투의 무게 만큼이나 재호의 마음도 무거웠다. "나 그만 갈게 성훈아 잘 먹고 간다" "오랫만에 왔는데 라면만 대접해서 어쩌지" "아냐 맛있게 먹었어" 재호는 어둠이 내린 버스정류장을 서성거렸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어린딸을 생각하고 아내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러다 무심코 넣은 외투 주머니 속에서 만원짜리 다섯장과 천원짜리 몇장이 들어있는 봉투를 발견했다. 재호 모르게 성훈이 넣어 둔 것이었다. 재호는 빠른 걸음으로 화실을 향해 걸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실문을 막 열려는 순간 안에서 성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 오후에 그림을 사러 오기로 했던 사람이 오질 않았어 수민이 생일 선물로 곰 인형하고 크레파스 사간다고 약속 했는데 차비밖에 없으니 큰일이네" 재호는 차마 화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 왔다 추운 화실에 앉아 성훈은 굳어진 손에 하얗게 입김을 불어가며 그림을 그렸다. 인형과 크레파스 대신 딸에게 줄 그림속에는 아기공룡 둘 리가 분홍빛 혀를 내밀고 웃고 있었다. 성훈은 채마르지 않은 그림을 손에 들고 화실문을 나섰다. 그런데 바깥 문고리에 비닐 봉지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어둠속에서 들여다본 하얀 봉지 속엔 귀여운 곰인형과 크레파스가 담겨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에선 축복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소리없이 쌓이는 눈송이 처럼 그들의 우정도 소리없이 깊어 갔다 사랑은 소리없이 와 닿을 때 가장 아름답다 ================================================================ <씨앗>동인 이철환씨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가슴찡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연탄길"에서

댓글목록

홍은화님의 댓글

홍은화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나는 슬픈영화를 보지 못한다. 내가 흘린 눈물의 한방울만큼도 그들에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들국화님의 댓글

들국화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쏴아는 속 시원한 소린디....  뜨뜻한 야그 구만요.ㅋㅋㅋ

松 竹님의 댓글

松 竹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찡한 우정...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요새 같은 세상엔 아주 필요한..

초이스님의 댓글

no_profile 초이스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눈빛만으로도 상대방 마음을 느낄 수 있음은,  피를 나눈 동기간 보다 더 끈끈한, 그리고 아름다운 우정이 깔려있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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